호모 사피엔스 - 8건
- 2007/01/17 인간의 두뇌에 관한 한 연구, 그리고 뇌학(腦學) (2)
- 2006/12/30 철학과 나의 생각
- 2006/12/15 oh, so beautiful-! (4)
- 2006/06/29 물리학, 수학, 공학, 그리고 방황 (2)
- 2006/06/15 물결이 하늘에 닿으매
- 2006/06/07 페르마와 쇼펜하우어 (3)
- 2006/06/04 행위의 결과
- 2006/05/03 수동적 정서에서 능동적 정서로
인간의 두뇌에 관한 한 연구, 그리고 뇌학(腦學)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창망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 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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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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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뇌과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한참 철학 인식론 분야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때, 만약 사람들이 뇌의 동작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면 인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지금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생각은 무엇인지. 위대한 예술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삽질을 했으며, 또 그로 인한 잘못된 결과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앞으로 과학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과연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나는 왜 행복하고 왜 불행한지.
철학, 과학, 언어학, 심리학 등등의 모든 학문이 뇌학(腦學)이라는 하나의 학문 - Theory Of Everything - 으로 통합되고 더이상 밝힐 것도, 더이상 알아야 할 것도 없어진다. 인간은 뇌라는 기관을 통해서만 사고하고, 그 사고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느낌으로써 존재하므로. (cogito ergo sum?)
이러한 생각은 앙리 베르그송 선생이 무덤을 박차고 뛰어나올만한 극단적인 유물론적, 기계론적 사고일 수도 있지만, 그 생각 자체는 상당히 매력적인 혹은 자극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사람의 사고 자체 - 사람이 느끼는 세계 전체 - 를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처럼 사람에게 가상의 기억을 주입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설정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진다(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매트릭스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지만). 온갖 악재가 겹친,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불행한 상황에 있는 사람도 뇌의 조작으로 엄청난 행복감에 휩싸여 살게 할 수 있고, 누가 보더라도 더이상 바랄 것 없을 정도로 행복해야 할 사람을 크나큰 좌절의 늪으로 보낼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그러한 '조작된' 현실을 자신의 진정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된다. 마치 요즘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허나 (아직까지는) 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고,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지만) 아주 먼 훗날에도 뇌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내 눈을 스스로 보려는 꼴이라고나 할까. 메타언어라는 개념까지 도입해가며 언어로 언어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힘든 것처럼, 뇌를 이용해서 뇌를 이해하려는 시도도 결코 쉬워보이진 않는다. 그것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을지라도.
뭐 결론이야 어쨌든 간에, 자신에 대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게 배려(?)해준 뇌에게 잠시나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도 될 듯 싶다. 물론 이 생각도 뇌가 하는 것이긴 하지만.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자기 원인causa sui은 지금까지 사유된 것 중 가장 심한 자기 모순이며,
일종의 논리적인 강요이며 부자연스러움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 중 두 명이 정면 충돌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책의 제일 첫부분의 정의 1로 내세워서 나머지 철학적인 명제들을 증명하는데 이용하였고, 니체는 그러한 스피노자의 기본 명제 자체를 모순이라며 반박하고 나선다. 만일 니체의 말이 맞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의 주춧돌을 빼버리는 셈이니 스피노자 철학의 진실성 자체가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저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는 니체의 사유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의 말을 믿고, 누구의 생각을 따라야 하는가?
"선생님, 당신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절대적으로 진리만이 있어야만 합니까?"
반드시 누구의 말을 믿고 누구의 생각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사상은 없고, 모순 없는 사상도 없다. 심지어 나의 생각도 어제와 오늘, 한 시간 전과 지금이 같지 않을진대 한가지 불변하는 완전한 사고의 체계를 바란다는 것은 그 자체로 허구다.
철학은 어느 누구의 개념을 외우고 그것의 옳음,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개념, 생각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확장해 나가는 것, 그들 생각의 복제본이 아닌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옛 철학자들의 영양분 많은 토양을 기반으로 해서 나만의 생각의 꽃을 피워나가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리학, 수학, 공학, 그리고 방황
수학자들은 이성의 세계에서 진리를 추구한다. 그들은 수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수를 통해서 우주를 본다. 영화 '파이(π)'에서 처럼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은 숫자로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명제위에 서서 세상을 이해한다. 비록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에 의해서 수학이 진정한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수학은 아직 세상의 많은 부분에서, 아니 거의 모든 부분에서 유효하다. 또, 굳이 세상의 이해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수학 그 자체에는 엄청난 아름다움이 있다(그것만을 추구하는 수학자도 많고, 또 그런 수학이 진정한 수학이라고 생각하는 수학자도 적지 않다). 공식에 아름다움이 있고, 증명과정에 아름다움이 있다. 수학자 존 내쉬의 일생을 다룬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 제목을 'Beautiful Mind'라고 지은 것이 그냥 단순한 발상은 아니었으리라.
공학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수학과 물리학의 기초 토대 위에서 이 세상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 단지 '알아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아낸 뒤 그걸 이용하는 것'에 까지 나아간다. 공학자들은 인류애를 지닌 사람들이다.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처럼, 공학자들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인류에게 다양한 것들을 선물한다. 공학자들이 없었더라면 물리학자나 수학자의 업적들이 지금처럼 위대한 것으로는 평가받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공학을 공부한다. 공학은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인 학문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는 공학에 빠져들지 못했다. 철학에 관심을 갖다보니 본질적인 것에 더 큰 끌림을 느꼈던 때문일까? 단지 '이용하기 위해서' 수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나는 꽤나 불만스럽다(뭐든지 수단으로써 사용될 때는 매력도 재미도 떨어지는 법이다). 또 공학이 돈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타인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는 것이 공학이다. 여기에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학문의 부자유성도 나와 공학의 사이를 벌려놓는 데 한 몫을 했다. 아직까지 내 전공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지금 나는 방황하고 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이상과는 차이가 있는 현실 앞에서 나는 나침반을 바다속에 빠뜨려버린 배 위의 사람들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표류>라는 책에 '망설임과 방황은 청춘의 특징이자 특권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나 또한 지금 청춘이고 그로 인해 망설임과 방황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글쎄, 지금으로써는 현재의 방황이 내 미래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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퐝 2006/07/24 1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철학과' 나온 사람이 취직이 되는 이유 였어요. 그냥 생각하기로는 '철학과 나와서 사회에서 쓸 수 있는게 뭐지?' 이런생각을 하잖아요.. 교수되면 그게 잘되는거라고..
그런데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철학과 나와도 취직이 잘되는 편이래요..(물론 그책이 우리나라 사람이 쓴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실정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철학과를 나왔다면 최소한 다른사람들에 비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고 스스로 여러가지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거죠..
솔찍히 취직을 해서 일을하는데 필요한게 대학교에서 배운 전공지식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물결이 하늘에 닿으매
물결이 하늘에 닿으매 배 안에 있는 이들은 두려움을 몰라도 배 밖의 사람들은 마음이 서늘해지고, 미치광이가 날뛸 때 자리에 같이 있는 사람들은 경계할 줄 모르나 자리 밖에 있는 이들은 혀를 찬다. 그러므로 군자는 비록 몸이 일하는 중일지라도 마음만은 일 밖에 벗어나 있어야 한다.
월드컵으로 한창 떠들썩한 이 때, 축구에 흥분된 무리로 부터 벗어나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는 것은 어떠할지. 그렇게 바라봤을 때도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행동들이 진정 정상으로 보이는가?
페르마와 쇼펜하우어
그러나 이 책의 여백이 너무 좁아 여기 옮기지는 않겠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상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가지 사상을 전달하는데
이 책 전체보다 더 짧게 쓰는 방법을 발견할 수 없었다.
위 두 말들 사이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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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2006/11/15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일 내용 원안 게재 홍보 요청
편집담당님. 안녕하세요.
요청인은 파일내용 저자로서, 첨부파일의 피타고라스 수 공식과 2 가지 페르마 정리 증명을 파일내용 원안대로 게재 홍보하여 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내용은 2580 년 된 피타고라스 수를 모두 완벽하게 구하는 새 공식을 발견하고, 이 공식을 이용하여 370 년 동안 세계 수학계의 난제였던 페르마 정리를 2 가지 방법으로 간단명료하게 증명한 내용입니다.
지난 2 년간 다양하게 검증하고, 논문심사과오 시정요구 일인시위 120 일간 충분히 재검토하여, 파일내용에 오류가 전혀 없음을 저의 명예를 걸고 책임 보증합니다.
파일내용은 1 쪽으로 간명하지만, 수학적인 일반상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게임, 오락, 취미활동, 두뇌스포츠, 정교한 논리훈련, 교육, 독서와 사색 등의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내용이며, 대입 수능시험 후 학생들의 여가 선용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임을 확신합니다.
규정에 따른 재심불가라면서 침묵중인 공익법인에 대하여서는 심사과오에 따른 모든 결정이 원천무효임으로 부당 업무처리를 내부감사로 시정토록 의뢰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첨부 : 피타고라스 수 공식과 2 가지 페르마 정리 증명 1 부. 끝. -
leejaeyul 2010/01/24 2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CT& 페르마 정리 증명 심사오류 내부감사 직무유기 방치
심사의견 전체 오류임을 입증하는 다음 두 가지를 조사하라.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공익법인인 대한수학회의 반례를 요구하는 방법도 있고, 수학 기초지식을 가진 제3자에게 감정 의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다음 세 가지 공식들은 모든 피타고라스 수를 구할 수 있다.
X=(2AB)1/2+A, Y=(2AB)1/2+B, Z=(2AB)1/2+A+B
상기 공식은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Z=2cd+c2+2d2 같이 된다.
위 공식은 c+d=r 일 때 X=r2-d2, Y=2rd, Z=r2+d2 같은 기존 공식이 된다.
둘째, [2{(n-1)/n}+……+2(2/n)+2(1/n)](자연수){(n-2)/n} 과 (자연수)/(무리수) 는 항상 무리수가 된다.
2006.3.3. 투고논문에 대한 2006.6.12. 심사의견이 전체적인 오류임을 지적하며 공익법인 내부감사를 의뢰하였으나 부당업무에 대한 감사도 아니하고 회신조차 아니 함에도 주무관청이 이를 방치하고 있다.
아펠과 하켄의 1976 년경 4색 구분 정리 증명은 1200시간 컴퓨터작업이 필요하고, 와일즈의 1997 년경 페르마 정리 증명은 200 쪽 방대한 분량으로서, 간단명료한 증명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우리의 간명하고 완벽한 4색 구분 정리 증명과 페르마 정리 증명을 부인하는 수학자는 국내외에 아무도 없다.
* * * 09.11.17. 감사원장 조치내용 * * *
“귀하께서는 감사원에 민원 (접수번호 제2009-08868, 08881, 08955호)를 제출하셨습니다. 검토결과, 위 민원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조사할 사항으로 판단되어 교육과학기술부로 하여금 이를 조사 처리하고 그 결과를 귀하께 회신하도록 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 * * 06.6.12.이후 공익법인 부당업무 * * *
첫째, 논문심사의견 전체오류이며 편집장이 잘못된 주장만 반복하고 07.1.5.이후 회신도 없다.
둘째, 부당업무 고발에도 자체 내부 감사를 실행하지 아니 한 잘못을 하고 회신도 없다.
셋째, 주무관청의 성의를 가지고 답변하라는 요청도 무시하는 잘못을 하고 회신도 없다.
4색 구분 정리 증명과 페르마 정리 증명 요약
4색 구분 정리 증명
[1] 한 점에 접하는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된다.
[증명] 한 점에 접하는 지역들 중에서 한 지역을 선택할 때, 이 선택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은 2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2] 한 지역에 접하는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된다.
[증명] 한 지역 내의 한 점과 주변 지역들의 경계선들이 한 지역의 경계선과 만나는 점들을 연결할 때, 이 지역들은 결국 한 점에 접하는 지역들과 마찬가지로서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3] 한 지역과 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을 구분함에는 4색으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한 지역은 모든 모양의 무수한 지역들을 포함할 수 있다.
[증명] 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2 가지 방법의 페르마 정리 증명
Xn+Yn=Zn
A=Z-Y, B=Z-X
X=G(AB)1/n+A, Y=G(AB)1/n+B, Z=G(AB)1/n+A+B, X+Y-Z=G(AB)1/n
{G(AB)1/n+A}n+{G(AB)1/n+B}n={G(AB)1/n+A+B}n
n=1 일 때, G=0 이고, n=2 일 때, G=21/2>0 임.
X=(2AB)1/2+A, Y=(2AB)1/2+B, Z=(2AB)1/2+A+B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and Z=2cd+c2+2d2
c+d=e 일 때, X=e2-d2, Y=2ed, Z=e2+d2.
페르마정리 증명 제1방법
Xn+Yn=Zn
(Xn/2)2+(Yn/2)2=(Zn/2)2
a=Zn/2-Yn/2, b=Zn/2-Xn/2
{G(ab)1/2+a}2+{G(ab)1/2+b}2={G(ab)1/2+a+b}2
G=21/2>0
Xn/2=(2ab)1/2+a, Yn/2=(2ab)1/2+b, Zn/2=(2ab)1/2+a+b
Xn={(2ab)1/2+a}2, Yn={(2ab)1/2+b}2, Zn={(2ab)1/2+a+b}2
홀수 n 에서 X, Y 와 Z 가 자연수일 때, 위식의 Xn, Yn 과 Zn 는 자연수이지만, 우변의 {(2ab)1/2+a}2, {(2ab)1/2+b}2, {(2ab)1/2+a+b}2 은 자연수가 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함으로 X, Y 와 Z 는 자연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짝수 n 에서는 위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편, 짝수 n 에서는 모든 피타고라스 수가 거듭제곱이 될 수 없음으로 자연수 해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페르마정리 증명 제2방법
{G(AB)1/n+A}n+{G(AB)1/n+B}n={G(AB)1/n+A+B}n
위 식에서 A=B 일 때, G=[{2(n-2)/n+…+21/n+1}n{2A(n-2)}]1/n 을 구할 수가 있고,
상기의 식들을 이용하여, 모든 자연수 A, B에서
G(AB)1/n 이 절대로 자연수가 될 수 없음이 증명된다.
[증명인: 이재율과 이유진]
수동적 정서에서 능동적 정서로
수동적인 정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명석 판명한 관념을 형성하는 순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증명 ...(생략)...
보충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정서가 더 잘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정서는 우리들의 힘 안에 있으며 또한 정신은 그만큼 더 정서의 작용을 적게 받는다.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수동적인 정서에 대한 관념을 형성했다.
"외로움"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겪고있는 수동적인 정서였다.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은 했었지만 확실한 관념이 형성되지 않았던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수동적인 정서에 사로잡혀서, 스피노자의 용어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요 며칠동안 너무 외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내가 겪던 수동적인 정서를 알아내면서(관념을 형성하면서) 이 외로움이라는 정서는 더이상 수동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 수동적인 정서가 아니므로 위 정리의 보충에서처럼 나는 그 정서의 작용을 더 적게 받게 되었다. '슬픔'은 더이상 없으리라.
덧. 위에서 내가 쓴 글은 위의 스피노자의 정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 글은 아니다(스피노자의 올바른(?) 견해대로라면 나는 외로움이라는 정서에 대한 보다 명석 판명한 관념을 형성했어야 한다). 하지만 심적으로 방황중이던 그 때의 나에게 <에티카>의 저 한 구절은 그 어느 때보다 내 가슴속 깊이 들어왔고, 나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다. 이런 것을 철학의 효용이라고 한다면, 위의 스피노자의 정리에 대한 나의 또다른 해석도 어떤 하나의 '철학'이리라 생각한다. (2006. 5. 26 오전에 덧붙임)


오 대박 ^^ ㅋㅋ
다음주부터 입사지?
열심히 열심히- ^^